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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대/싱가포르

방구석 여포, 싱가포르 생활 경험 믿는 도끼에 발등 찍힌다

by 디케이89or90 2020. 9.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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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게 뭔일이래?

이튿날 퇴근하고 돌아온 숙소에서는 분위기가 이상했다. 내가 출근해서 일하는 사이 M이 짐을 들고 숙소를 나가버렸다고 한다. M과 같은 호텔에서 근무하는 다른 이의 말로는 남은 월세는 깔끔하게 지불하기로 하고 숙소를 나가버렸다고 한다. 들려오는 말해 의하면 M이 숙소에 사는 사람들에 대한 배신감?! 같은 감정이 들어 숙소에서는 나갔다고 한다. 

M은 같은 호텔 다른 이의 숙소에서 출국날까지 지내다 그렇게 떠나버렸다.

M과는 마지막으로 전화 통화를 했다. 그냥 보통의 덕담을 주고 받고 그렇게 전화를 끝으로 M을 다시 보진 못했다.

 

나와 같은 방을 쓰는 J는 출국일까지 같이 지내다 조촐하게 술 한잔과 함께 작별 인사를 나눴다. 

J하고는 지금도 가끔 연락을 주고 받는다. 같이 산건 6개월 이지만 여전히 만나면 할 이야기가 많던 싱가포르의 생활이었다. 

 

이제 숙소에는 나를 포함해 3명만이 남았고 이렇게 남은 사람들은 싱가포르에 더 있을 생각이었다. 

살고있던 숙소의 계약기간은 3달이 채 남지 않았다. 4명이서 같이 살지 아니면 각자 흩어져 살지를 고민해야 할 시기였다. 답은 심플했다. 이전의 사건들을 겪으며 남은 우리는 같이 사는건 그리 좋지 않은 선택임을 모두가 공감했다. 

그러나 그중 나와 마음이 맞는 한 사람 L과는 같이 방을 구하는 것에 대해 논의 했다.

다행히 생각이 비슷했고 L과 나는 3곳의 다른 지역의 방을 보다 한 곳과 계약할 수 있었다. 지금의 숙소보다는 조금 더 좋은 환경에 넓은 곳으로 이사를 하게됐다. 

한국인이 주인이신 곳에 들어가 홈스테이 비슷한 생활을 시작하게 됐다.

** 싱가포르에서 한국인들이 방을 빌려주는 경우를 많이 볼 수 있다. 실제 한국인 커뮤니티를 보면 한 가족이나 개인이 한 집을 빌려 세를 주는 경우이다. 싱가포르 집 값이 굉장히 비싸기 때문에 이런 일이 많다.

정부 아파트 개념인 HDB의 당시 매매가가 한화로 6~7억 정도 였으니 지금은 더 비싼게 당연한 사실일 것이다.

  

싱가포르 집값

한국인이 주인인 새 숙소에는 L와 나를 제외하고도 주인의 두 아들과 다른 세입자 2명이 더 있었다. 

어차피 숙소의 개념이라 별 상관은 없었다. 출근하고 퇴근하고 하다보면 어차피 숙소에 머물 시간은 별로 없이 때문이었다. 호텔에서 일 한다는 것이 교대 근무도 있고 주말에 잘 쉬지도 못하는 직업이지만 주일에 쉬게되면 꼭 교회를 나갔다. 처음에는 영어로 예배를 들이는 로컬 교회를 나갔었지만, 영어 초보자이던 내가 알아듣기에는 너무 어려웠다. 

그래서 한인 교회를 소개받아 나가기를 몇달이 되던 시점이었다. 

어느 주일 오랜만에 쉬게 되어 교회를 나갔다. 예배를 드리러 가던 복도에서 낯익은 한국인 아줌마를 발견하게 되었는데, 세상에 지금 살고 있는 숙소의 주인 아주머니였다. 세상이 좁다라는 말이 괜히 있는게 아니였다. 

이후 주인집 아주머니와 두아들과 함께 교회를 나가기도 했고 많이 가까워 지는 계기가 되었다. 

 

어느덧 싱가포르 생활 1년이 가까웠다. 1년이 됐으니 한국에 다녀오고 싶었다. 

2011년 11월 싱가포르에 온지 1년 쯤에 휴가를 내고 한국을 다녀왔다. 오랜만에 백지처럼 깨끗하던 내 여권에 도장이 찍혔다. 1년만에 본 가족들과 친구들은 무척이나 반겨줬고 나도 오랜만에 느끼는 친근함에 너무 기뻤다. 휴가는 10일을 신청했고 한국에는 9일만 머물기로 비행기 예약을 했다. 오래 머무르면 오기 싫어질 것 같은 두려움이 있었기 때문이다. 

 

모임

마침 그때가 내 생일 쯤이여서 많은 사람들에게 축하를 받으며 기분 좋은 휴가를 보냈다. 오랜만에 엄마와 시장을 보러 가기도 했다. 같이 장을 보다 엄마의 옆 모습을 본 나는 갑자기 슬퍼졌다. 1년만에 본 엄마의 모습이 많이 늙어 보였기 때문이다. 그런 엄마를 보며 더 잘해야 겠다. 그리고 싱가포르에서 더 열심히 해서 잘 돼야 겠다라고 다시금 마음을 다잡았다. 싱가포르 돌아가던 비행기안 23살이던 나는 복잡함을 가지고 다시 싱가포르로 돌아왔다.

 

싱가포르로 돌아와 얼마 지나지 않아 같이 살던 L과도 작별을 해야했다.

새로운 숙소에서 L과는 3개월 정도를 같이 살았다. L은 싱가포르 생활을 접고 옆나라 말레이시아로 간다고 했다. 같이 사는 3개월간 L과 술도 많이 마시고 이런 저런 이야기를 많이 나눌 수 있었다. 정말 의지가 되던 형이었다.

몇년이 지나고 내가 말레이시아로가 L은 나의 상사가 된다. 

끝까지 L은 멋있는 사람이었다. 숙소의 계약 기간이 한참 남았지만 자신 몫의 보증금을 포기하고 3개월 치의 월세까지 미리 지불하고 떠났다. 나혼자 방을 온전히 쓰게 해주기 위해 L은 나에게 그런 배려를 했다. 자신이 직접 주인아주머니와 담판을 짓고 떠나기전 나에게 말해 주었다. L에 대한 고마움과 좋은 인상은 계속해서 간직하게 됐다. 

L과도 제대로 된 작별은 하지 못했다. 출근하고 돌아와 보니 L은 홀연히 떠나 있었다. 

 

그렇게 1년 남짓 된 싱가포르 생활에서 많은 작별을 하고 경험을 쌓으며 살아가던 나의 싱가포르에서의 첫 해가 지나가고 있었다.

 

 

오늘의 이야기는 여기까지!

 


 

끝으로 여러분에게 들려드리고 싶은 노래 아래 사진에 링크 남겨드립니다.

 

브라운 아이즈 - 벌써 일년

브라운아이즈 벌써일년

 

처음이라 그래 몇일뒤엔 괜찮아져
그 생각만으로 벌써1년이
너와 만든 기념일마다 슬픔은
나를 찾아와
처음 사랑고백하며 설렌
수줍음과.
우리 처음 만난날
지나가고
너에 생일엔 눈물의 케잌
촛불켜고서 축하해
아이빌리빈유
아이빌리빈유월마인드
벌서1년이 지낫지만
1년뒤에도 그1년뒤에도 널기다려
너무 보고싶어 돌아와줘
말못햇어.
널보는 따뜻한 그의 눈빛과
너의 손에 껴진 반지보다
빛난 니얼굴 때문에
아이빌리빈유
아이빌린유월마인드
다시 시작한 널 알면서
이젠 나없이 추억을 만드는 너라는걸
내가 기억하는 추억은 언제나
지난 웃음과 예기와 바램들
또 새로만들 추억은 하나뿐
내기다림과 눈물속 그대뿐~
아이빌리빈유
아이빌리빈유얼마인드
다시 시작한 널 앎면서
이젠 나없이 추억을 만드는 너라는걸~
아이빌리빈유
아이빌리빈유얼마인드
벌써1년이지낫지만
1년 뒤에도 그1년 뒤에도 널기다려

 

 


 

언택트가 떠오르는 포스트코로나 시대 뉴노말로써방구석 여포의 이야기 끝까지 읽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다음 이야기로 찾아오겠습니다.

 

당신은 잘하고 있어요 물론 나도 잘하고 있어요 괜찮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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