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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스트코로나13

싱가포르에서 첫날 그리고 나의 첫 해외 싱가포르 첫날 싱가포르에서의 첫날은 잊을 수 없다. 그리고 잊어서는 안 된다. 나의 첫 해외 그리고 첫 독립 낯선 곳에서의 시작! 여러 가지 복잡 미묘한 감정이 나를 에워싸고 있었다. 마치 소풍을 온 것 같았고, 수련회를 온 것 같았다. 며칠 있으면 다시 갈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쉽사리 짐을 풀 수 없었다. 아니 짐을 풀기 싫었다. 아직 시작도 안 했으니 다시 되돌릴 수 있지 않을까 라는 어리석은 생각도 가졌다. 같이 사는 형들의 따뜻한 배려에도 불구하고 나의 싱가포르에서의 첫 밤은 그렇게 고민과 걱정을 가득 안고 지나가고 있었다. 이튿날, 아침에 일어나 나갈 채비를 했다. 싱가포르에서 워킹비자를 정식으로 받기 위해 시내로 나가야 했다. 어제 헤어진 R을 다시 만나기로 했다. 내가 사는 숙소를 나와 조금 .. 2020. 7. 31.
싱가포르에 도착! 이제부터 시작 이제 시작인가? 6시간 30분의 비행을 끝으로 동남아시아 싱가포르에 도착했다. 한국 촌놈, 첫 해외 싱가포르... 나름의 각오와 다짐을 가지고 온 낯선 땅에서의 삶이 이제 막 시작하려 했다. 비행기를 나와 이미그레이션으로 향했다. 여권을 보여주고 싱가포르에 취업했다는 확인 레터를 꺼내 보여주었다. 이미그레이션 직원이 몇 마디를 건넸지만, 영어를 정말 못하던 그때의 나는 멋쩍은 웃음을 지으며 "Yes, Yes"를 반복적으로 대답할 뿐이었다. 취업확인 레터 때문이었을까? 나중에 알게된 사실이지만, 싱가포르 취업 비자는 Work-Permit, S Pass, Employment Pass 이렇게 대표적으로 3가지로 나뉜다. 각 취업비자는 Work-Permit < S Pass < Employment Pass 순으로.. 2020. 7. 28.
싱가포르로 가자! - 2편 출국 준비 그리고 출국!! 어렵게 3번의 면접을 본 후 싱가포르 센토사에 위치한 호텔에 취직을 하게 되었다. 이 소식을 제일 먼저 엄마에게 말씀드렸다. 엄마는 별말씀이 없으셨다. 다른 말 없이 엄마는 나의 출국 준비를 묵묵히 도와주셨다. 약 2주간의 서류 작업이 이루어졌고 무난하게 취업 비자를 받았다. 비행편도 별 무리없이 예약하고 모든 것이 순조롭게 진행됐다. 딱 하나 출국 일주일을 앞두고 연평도 포격이 일어난 것을 제외하면 말이다. 당시 연평도 포격으로 인해 환율이 급등했고 정세가 불안하여 출국에 문제가 될 수 있던 상황이었다. 천만 다행히 도 출국에는 문제가 없었다. 2010년 11월 30일 출국 마침내 싱가포르로 출국일이 다가왔다. 출국 당일의 날씨는 맑고 깨끗했다. 한편으로는 두려웠다. 22살이.. 2020. 7. 25.
싱가포르로 가자! 싱가포르로 가자! 20대 초반의 나는 한 가지 중대한 결정을 했다. 해외로 가자! 목적지는 싱가포르! 왜? 해외로 가려고 결정했을까? 그때 당시 나에게는 아무것도 없다고 생각했다. 학벌도 재력도 어느 것 하나 내세울 게 없었다. 학점은행제를 마친 가난한 나에게는 많은 선택지가 존재하지 않았다. 그래서 해외로 나가 조금이라도 특별한 경험을 쌓고 싶었다. 영어도 제대로 배우고 경험도 쌓고 일석이조 특별한 경험을 토대로 조금이라도 뒤쳐진 나의 학벌을 뒤집어 버리고 싶었다. 또 다른 이유로는 한국에서 도망치고 싶었다. 더 자세히 말하자면 가족에게서 도망치고 싶었다. 가난한 집이 싫었고 가난한 삶이 싫었고 하루하루 한 숨 밖에 나오지 않는 가족의 상황이 싫었다. 이대로 내 삶이 그저 그렇게 되는 게 싫었다. 왜?.. 2020. 7. 24.
Seven (일곱 살 ) 그날 Seven(일곱 살) 6살 아빠의 죽음은 많은 것들에 영향을 주었다. 엄마, 형, 나, 동생 모두에게... 엄마는 독실한 기독교 신자였다. 그러나 아빠의 죽음 이후 엄마는 더 이상 교회에 나가지 않으셨다. 하나님 대신 무속신앙을 믿었고, 집에 있던 성경은 부적으로 바뀌어 갔다. 평범한 전업주부의 삶에서도 벗어나게 되었다. 하루아침에 아빠의 회사를 운영해야 할 상황에 놓였고, 이젠 혼자 힘으로 삼 남매를 키워야 했고, 엄마로서 가장으로써의 역할을 해내야 하는 슈퍼 우먼이 돼야 했다. 그런 엄마를 7살의 내가 이해하기에는 어렸고 오히려 짐이었다. 집에 계시던 엄마의 모습은 점점 사라져만 갔다. 하루하루 그전 엄마의 모습은 멀어져만 갔다. 아침에 자식들을 학교, 유치원에 보내고 전쟁터에 나가 여자로서 엄마로서.. 2020. 7. 22.
One to Six(한살 투 여섯살) One to Five(한 살 투 다섯 살) 1989년 겨울이 오기 조금 전 M타운에 태어난 아이 사업가 아빠, 전업주부 엄마, 제법 터울이 있는 형 그렇게 4번째 가족으로 태어났다 부족한 것 없었고, 오히려 풍족하게 살았다. 2년 후 아빠와 엄마가 그토록 바라던 딸 까지 낳으며 우리 가족은 5인 가족으로써 남 부러울 게 없었다. 우리 삼 남매에게는 한 가지 공통점이 있는데 모두 어릴 때 비만이었고, 출생신고를 태어난 다음 해에 했다는 것이다. 그래서 나도 1989년에 태어났지만 주민등록상은 1990년으로 되어있다. 내가 디케이 89 or 90 인 이유이다. 아빠의 뜻에 따라 삼 남매가 학교에 들어가기 전 1년을 더 공부하길 바라는 마음에서 그렇게 했다고 한다. 안타깝게도 형을 제외한 나와 여동생은 본래 .. 2020. 7. 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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